우리역사

[스크랩] 〈세계를 놀라게 한 명량대첩〉

진실의빛 2005. 7. 25. 08:46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해전의 전투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 뱃머리를 돌려서 빗발같이 대포를 쏘았다. 이로 인해 세 함선에 타고있는 적의 대부분이 사살되었다. 이어 녹도만호(鹿島萬戶)의 배와 평산포대장(平山浦代將) 정응두의 배가 도착하여 세 척의 배가 포를 집중하였더니 왜선 갑판 위에는 적의 그림자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셋째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당파전술(撞破戰術)을 들 수 있다. 함포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적함을 파쇄하거나 탑승원을 사살하지만 당파전술이란 적선에 접근하여 충격을 가함으로서 완전히 격침시키는 것이다. 당파전술이 가능하였던 것은 조선 수군 전함의 견고성에 기인한다는 것도 앞에서 설명했다.

 

그러나 세 가지 승전 요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라해도 화포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수군의 화포는 워낙 왜군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있으므로 당초부터 해전에 관한 한 왜군은 조선 수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최무선이 세계 최초로 고안한 함선 내의 화포 사용 전술을 계승한 조선군이 왜군의 대포가 미치지 못하는 거리에서 왜군을 향해 발사하는 것을 왜군이 당해낼 수는 없었다.


임진왜란 해전 전쟁 기록화(전쟁기념관).

   
임진왜란을 평할 때 많은 학자들이 조선 정부가 당파싸움을 하느라 임진왜란에 적절히 대비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많이 한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비록 조선 정부가 무능했다고는 하지만 화포를 개발하고 화약을 자체로 공급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이 조선에 있었고 또한 화약무기를 해전에서 유효적절히 사용하는 노하우(know-how)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비록 위정자들은 세계 정세를 잘 모르고 당파싸움에 빠져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꿋꿋이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보존하는 최무선과 같은 과학자들의 후예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세계를 놀라게 한 명량대첩〉


전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의 명량대첩기념비. 숙종 14년(1688)에 세워졌으나 일제 강점기시 피해를 입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졌던 것을 1945년 해방 이후 우수영 유지들에 의해 원래 세워졌던 장소로 회수됐다(보물 제 503호).
1597년 음력 9월 16일, 좁은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13척의 함선은 일본 전함 133척(200여 척이라는 설도 있음)에 포위되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잠시 뒤, 바다 위에는 13척의 조선 전함만이 남았다. 13척으로 133척을 대파한 믿을 수 없는 승리였다. 이 해전이 바로 명량대첩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13척으로 133척의 함대를 어떻게 물리칠 수 있었을까. 대다수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이 있었고 무적함대인 거북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거북선은 명량해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완벽하게 승리한 이유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한 마디로 왜선이 1000척이었다고 해도 조선 해군이 승리했다고 장담하는 것이다. 충무공의 여러 전적 중에서 명량대첩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전라남도 해남의 어란진은 현재 약 200호가 사는 작은 어촌이지만 1597년 9월 7일 133척의 전함과 보습선, 연락선 등 총 500여 척의 일본 함대가 집결했다. 이곳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133척의 일본 대 선단은 9월 16일 이른 아침 어란진을 출발한다. 그들의 목적지는 조선 수군이 진을 치고 있는 우수영으로 지금의 진도대교가 가로놓인 울돌목을 통과하는 것이다.

 

이 당시 조선 수군의 전력은 모두 13척, 133척의 일본 대함대를 싸우기 위해 역부족으로 보이지만 이순신 장군의 독려로 우수영을 떠나 명량해협으로 진군한다.

 

이순신 장군은 이 날의 일기인 『난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싸여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군사들이 모두 사색이 되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나머지 배들도 겁을 먹고 진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단 2시간 만에 막을 내린다. 전투의 결과는 그야말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선 수군의 대승이었다. 『난중일기』에 적힌 이날의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이순신 전함의 전사자 2명, 부상자 3명.’

 

학자들은 이 당시 총 13척을 가진 조선 수군의 총 피해는 전사자 약 30명, 부상자 약 40명으로 모두 70∼100명 미만의 사상자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반면에 일본 수군의 피해는 막대했다. 각종 기록을 종합해 추정해보면 일본이 입은 피해는 다음과 같다.

 

격침된 배는 31척, 약 90척은 심하게 파손된 채 도주했다. 격침된 배의 전사자는 최소한 3500명, 당시 격침되지 않은 배에 타고 있던 일본 수군을 총 9000명으로 추정하는데 학자들은 이들 중 절반 가량인 4500명이 조선군의 포탄에 맞거나 화살에 맞아서 전사하거나 바다에 빠져 익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명량해전 단 한 전투에서 일본 수군 8천 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조선 수군의 전함은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었다. 13척으로 133척을 물리친 신화적인 전투로 일본은 씻을 수 없는 대참패의 오명을 남겼고 이 전투를 이끈 이순신 장군은 세계 해전사에 유례없는 이름을 올렸다.

 

〈전선 12척이 남아있다〉

 

원래 조선 수군도 명량 해전 전에는 상당수의 전투함을 갖고 있었지만 명량해전에 막상 참가한 조선 수군의 배는 고작 13척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은 원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대패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적은 이때의 전과는 다음과 같다.

 

‘일본 장수 시즈마 160여 척 격파, 도도 60여 척, 야스하루 16척, 목을 벤 자만도 수천 명에 이르며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전멸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중에서 여러 가지 중요성과 의미를 갖고 있는데 우선 일본군이 처음으로 수군과 육군의 양면작전을 펼쳐 조선군을 격파했다는 점이다. 반면에 조선 수군은 지휘관인 원균이 수육양면작전의 필요성을 역설했음에도 이를 묵살 당한데다가 도원수 권율로부터 해군참모총장격인 원균 장군이 곤장을 맞는다. 원균 장군은 육군과 수군이 연합작전을 펼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전황을 잘 모르는 조선 정부의 압력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수군 단독으로 출전했는데 전투 결과는 원균 장군의 예상과 같았다.

 

거제도 앞바다의 좁은 포구에 정박했던 조선 수군은 왜수군의 기습을 받아 상당한 피해를 입자 육지에 상륙하여 전세를 수습하려 했으나 육지에 미리 매복하고 있던 일본 육군에게 원균 장군, 이억기 장군 등을 비롯한 수군 지휘관들이 거의 전사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피해는 당시 조선 수군의 배가 모두 134척이었는데 도주한 배 12척을 빼고 모두 침몰되었다는 점이다.

 

수군의 존재가 거의 사라진 것이다. 조선 수군의 참패는 임진왜란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해상권은 조선이 갖고 있었는데 이 전투 후로 해상권마저 일본군이 갖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왜수군이 해상권을 확보했다는 것은 왜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던 후방보급이 보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왜군은 조선 수군 때문에 한반도의 서해 진출이 봉쇄되었지만 칠천량 전투의 승리로 이런 걸림돌이 해소되었다는 것이 왜군으로서는 큰 성과였다.

 

이 당시 이순신 장군은 권율 장군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고 있었다. 원균의 패배로 허둥대던 조선이 찾은 방책은 이순신 장군을 다시 복권시키는 것이다. 당시 선조가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지난날 그대를 백의종군케 해서 오늘 이런 패전의 욕됨을 입었으니 무슨 할말이 있으리요. (중략) 그대는 부디 충의를 굳건히 하여 다시 나라를 구해주기 바란다.’

 

선조의 사과문을 담은 이 교서를 받은 이순신은 곧바로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 작업에 착수하지만 이순신 장군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신이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는 세곡(稅穀)을 보관하던 조양창을 찾았지만 창고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군의 기반이라고는 불과 네 마리의 말에 실은 무기와 120명의 군사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추석 저녁 뜻밖의 어명을 받는다. 군사를 모두 합쳐 육전에 참가하라는 것이다.

 

조정에서는 배도 없고 무기와 군인도 없으므로 권율이 이끄는 육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이었다. 반면에 이순신은 왜적을 바다에서 막아야만 조선군이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은 수군 철폐를 반대하는 장계를 올린다.

 

“지금 신(臣)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 수군을 폐지하면 이는 적이 바라는 바로, 적은 호남을 거쳐 쉽게 한강까지 진격할 것입니다. 오직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비록 전선이 적으나 신이 아직 살아 있으므로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단 12척의 함선으로 왜수군을 격파하겠다는 이순신의 비장한 장계로 조선 수군의 명맥은 유지된다. 1597년 8월 18일, 이순신은 장흥 화진포에 도착하여 12척의 배와 새로 합류한 배 한 척, 모두 13척으로 조선 수군을 새로 조직하고 최후의 결의를 밝힌다.

 

“임금의 명을 받았으니 함께 죽는 것이 마땅하다. 나라를 위한 목숨이 무엇이 아까우랴.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1905년 러시아 함대를 궤멸시킨 일본의 영웅 도고(東高) 제독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를 영국의 넬슨 제독과 비교할 수는 있지만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는 견줄 수가 없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순신 장군을 따라갈 수는 없다.”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멀티플레이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