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만 안 본다, 6시간 걸려 문제 풀고 면접도 최장 7시간
직원 4명 두 달 매달려 인턴 뽑아
함께 할 확신 설 때까지 거듭 평가
스펙 아닌 스펙의 본질 본다
영어 점수 안보고 활용능력 확인
학벌 대신 배움 의지 있으면 돼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은
인력·시간 몇배 필요, 쉽진 않을 것
그럼에도 미래세대 위해 도입해야
━ 토종 SW기업 제니퍼소프트사 블라인드 채용 12년
‘지원방법:자유양식의 이력서. 이력서에는 학력·성별·사진·나이 등은 적지 말아 주세요’.
토종 소프트웨어 기업 제니퍼소프트가 12일 홈페이지에 게시한 공개채용 공고의 문구다. 이 기업은 채용 과정에서 학력·학점·토익 성적뿐 아니라 성별·나이까지, 일체의 ‘스펙’을 보지 않는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전공이 뭔지 모른 채 직원을 뽑고 이에 관심도 없다. 정부가 공공기관에 전면 도입하기로 한 ‘블라인드 채용’을 2005년 설립 뒤 매년 이어 가고 있다. 기업 규모(직원 35명)가 적어 연간 채용인원은 1~2명에 그치지만 수백 명의 젊은이가 몰리는 곳이다.
주 35시간 근무제, 사내 수영장 이용도 근무시간에 포함하는 파격적인 복지 혜택을 주고 있다. 이 때문에 ‘꿈의 직장’ ‘한국의 구글’로 불리는 회사. 삼성·LG·CJ 등 대기업이 수시로 견학하는 회사다. 12일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있는 본사에서 이 회사 이현철 부대표를 만났다. 그는 오스트리아법인에서 글로벌사업을 맡고 있는 이원영 대표 대신 헤이리 본사를 이끌고 있다.
Q : 설립 이후 줄곧 채용할 때 스펙을 보지 않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A :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같은 이유는 아니에요. 기업으로서 더 좋은 인재를 뽑는 방법을 찾았을 뿐이죠. 스펙은 인사담당자에게 편리한 체(거르는 기구)예요. 그렇게 걸러진 사람이 회사와 맞는 인재인지는 의문이죠.”
Q : 그럼, 어떤 식으로 채용을 진행하나요.
A : “매번 달라요. 뽑고 싶은 친구에 대한 상을 그린 뒤 관련된 직원들이 모여 어떻게 뽑을지 얘기하죠. 채용 담당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실무담당자가 채용 절차를 설계하고 실제 평가까지 하죠. 한 번 채용하는 데 엄청난 자원이 들어가요.”
Q : 자원을 얼마나 투입하는데요.
A : “지난해 인턴을 뽑을 땐 직원 4명이 꼬박 두 달을 들여 채용을 진행했어요. 한 직원은 ‘(채용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힘들다’고 했죠. 본업인 개발 일을 그 기간엔 못하니까요. 저는 ‘좋은 사람을 뽑는 게 코딩 두 달 하는 것보다 가치 있다’고 얘기했죠.” 변화무쌍한 제니퍼소프트의 과거 채용방식은 이렇다. 개발자는 1차 관문이 과제 풀기다. 컴퓨터공학 지식이 있다면 푸는 데 6시간 정도 걸리는 문제를 내 통과한 사람만 면접을 본다. 이력서를 쓰거나 읽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을 서로 줄일 수 있다. 기본 소양 없이 ‘시켜만 주면 열심히 하겠다’는 사람도 거를 수 있다. 면접은 보통 지원자 1명당 2~3시간씩, 길게는 7시간을 한 적도 있다. 면접 횟수는 ‘이 사람과 일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다. 확신이 서지 않으면 1명도 뽑지 못하기도 한다.
■제니퍼소프트의 ‘글로벌 마케터’ 블라인드 채용 사례 「지원 요건 : 학력·외모·성별·나이 등 제한 없음. 지구별에 살고 있는 누구나 지원 가능 진행 과정 : 논술과제 → 개별 인터뷰 → 공개 프레젠테이션 논술 주제 : ①어떻게 살 것인가(A4 10매 이하) ②내 재능과 경험에 대한 비평과 발산(A4 5매 이하) ※과제물 분량은 심사에 영향 없음. 오로지 자신의 삶과 의식을 담아 한국어로 작성할 것 」
2013년 글로벌 마케터 채용방식은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1차 전형이 에세이였는데 주제가 ‘어떻게 살 것인가’와 ‘내 재능과 경험에 대한 비평과 발산’이었다. 글로벌 마케터인데 영어 성적은 보지 않았다. 이 회사 김윤희 마케팅 차장은 “학습능력·주도성 같은 기본 소양이 있다면 입사 뒤 영어를 배워도 충분하다는 게 대표의 생각이었다”고 전했다.
Q : 사전 e메일 인터뷰에서 ‘스펙을 안 본다는 것은 스펙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란 설명이 인상적이었어요.
A : “영어 점수, 보지 않아요. 영어가 필요하면 그 활용 능력을 면접으로 확인하죠. 학교도 보지 않아요. 대신 학습 능력과 배움의 의지를 보죠. 우린 스펙이 아니라 스펙의 본질을 보려고 해요. 자유양식의 이력서를 받는데 딱 보면 ‘아, 이쯤에 그게(스펙) 적혀 있겠구나’라고 감이 와요. 그 부분을 아예 읽지 않아요. 요즘 토익 스피킹 점수를 적던데 그거 적어도 우린 몰라요. 점수가 높은 건지, 낮은 건지.” 블라인드 채용과 관련해 일부 구직자는 ‘역차별’ 문제를 지적한다. 좋은 학교는 열심히 공부했다는 증거인데 그걸 보지 않는 게 역차별이란 주장이다. 이를 질문하자 이 부대표는 “좀 민감한 얘기일 수 있는데”라면서 답변했다.
“스펙을 위해서 했든, 진짜 공부였든 그 본질이 중요해요. 스펙을 위해 높은 영어 점수를 땄으면 영어 실력도 좋아야죠. 공대 학생이 학점을 따려고 열심히 공부했으면 프로그래밍도 잘하는 역량이 있어야죠. 그렇게 실력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런 얘기를 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스펙을 위한 공부만 해서 실제 실력이 없을 수 있어요. 사회의 불합리한 점, 채용제도의 문제이기도 하죠. 하지만 개인은 본질에 대한 실력을 키워야 해요.”
Q : 공공기관이 하반기부터 블라인드 채용을 하는데 어떨까요.
A : “솔직히 초기엔 잘 안 될 것 같아요. 제대로 블라인드 채용을 하려면 회사 자원을 많이 투입해야 해요. 지금 10명 뽑을 때 인사담당자가 1명이라면 블라인드 채용을 할 땐 3~4명을 투입하고 실무담당자까지 같이 해야 해요. 우리에게 필요한 좋은 사람을 반드시 뽑겠다는 각오와 이를 위해 조직적으로 투자하겠다는 의지를 리더가 갖지 않고선 성공하기가 어려워요.” 그럼에도 그는 블라인드 채용정책을 지지한다.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블라인드 채용은 도입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기업의 채용철학은 미래세대 교육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원하는 스펙을 위해 우리는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아요. 스펙 쌓기에 삶을 소비해 버리는데 그 모든 것이 불필요한 경우가 많죠. 초반엔 어려움이 많겠지만 ‘이렇게 하니까 좋은 인재가 채용되더라’는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달라질 겁니다.”
■[S BOX] 블라인드 채용에 울고 웃는 취업시장 「332개 모든 공공기관은 이달부터, 149개 모든 지방 공기업은 다음달부터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다. 입사지원서에서 편견이 개입될 수 있는 항목(출신 지역, 가족관계, 신체적 조건, 학력, 사진 부착 등)은 삭제한다. 면접위원에게도 응시자의 인적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블라인드 면접’을 실시한다.
정부 발표에 취업대비 학원은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블라인드 채용으로 전보다 자기소개서와 면접의 중요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사교육 수요가 전보다 늘어날 수 있어서다.
취업교육기관 KG아이티뱅크 문용우 대표는 “블라인드 채용이 도입되면 취업준비생 입장에서는 지원자 모수가 늘어나 면접전형 경쟁이 더 치열해질 수 있다”며 “블라인드 면접 방식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기 전이지만 미리 준비하려는 수요가 많다”고 설명했다. 토익이나 자격증 같은 스펙 쌓기에서 면접 준비로 취업 사교육 시장의 중심이 바뀌게 될 전망이다. 블라인드 채용 도입에 가장 강하게 반발하는 업계는 사진관이다. 한국프로사진협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13일 서울 광화문1번가 국민인수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력서 사진 부착 금지 방침은 30만 사진인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며 철회를 요구했다. 」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