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전두환이 두려워 했던 사람
일본에서 한국 드라마 <제 5공화국>이 방영 당시 인기가 많았다는 얘기를
우연히 들었는데, 아베가 대단히 즐겨보고 배웠다는 인터뷰가 나오더군요.
요즘 아베가 전두환의 언론통제를 배우려고 하는지..(웃음)
피식 웃고 넘어가려다 전두환과 끝까지 맞선 장태완 장군이 생각나서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아마 중장년층 분들은 대부분 알고 계실테고 20대 분들이 모르지 않을까 싶어서요.
1931 9월 13일 출생~ 2010년 7월 26일 타계
75세 때 실제 모습. 꾸준한 운동과 단련으로 75세의 나이에도 탄탄한 몸을 자랑했습니다.
6.25전쟁이 터지자 소위로 임관.
6.25전쟁에서 엄청난 사망률을 기록하며 총알받이 취급이던
육군종합학교 출신 소위 중에서 드물게 살아남았습니다.
육사 출신이 아님에도 야전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1979년 11월 16일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취임
파벌과 인맥으로 승진했던 박정희, 전두환 등의 정치군인들과는 격이 다른 참군인의 표상
전두환과의 악연은 사실 79년 12.12 쿠테타가 일어나기 3년 전인 76년
전두환의 손아래 동서이자 같은 하나회 소속인 김상구 중령 사건 때 시작됩니다.
전두환이 만든 군대 사조직 하나회는 육사 11기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는데요.
11기생들은 그 전 10기생까지 전쟁으로 인해 몇 주간의 단기교육을 받은 장교들과는 달리
자신들을 시작으로 유일하게 4년 정규 군사학문을 수료한
어찌보면 사실상의 육사 1기생이다라는 자부심을 가졌고
그로인해 선배 장교들을 대놓고 무시하는 언행을 보이며
파벌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이게 참 어이 없는게 10기생까지는 6.25전쟁통에
정규 군사학을 수료할 시간이 없어 몇주간의 단기교육 후
전쟁에 투입되었지만
그렇다해도 무려 3년 여간의 6.25전쟁을
실제로 겪고 투입되며 지휘를 하던 전쟁 경험자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런 역전의 용사들을 4년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의 선배 무시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1976년 6월. 장태완 장군은 서울 서부지역 수경사 진지공사에
순시를 나갑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장태완 장군을 보고 위병은 놀라
뒤늦게 신호버튼을 누르고 막사에서 놀고 있던 대대장 김상구 중령은
그를 맞이 합니다.
김상구는 전두환의 친척이고 육사 15기의 하나회 핵심
당시 장태완 장군은 김상구 중령에게 진지공사가
얼마나 개판이던지 크게 훈계를 합니다.
그러자 김상구 중령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4년제 육사에서 배울만큼 배운 장교입니다. 그 말 취소하십시오"
중령이 투 스타에게 실제로 할 말입니다.
김상구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대들었고 이에 장태완은 더욱 분노를 합니다.
중령이 감히 상급부대 장군에게 대드는 것은 하나회라는 뒷배경 때문이라
생각하니 더욱 괘씸했고 더 거친 언사가 입에서 튀어나옵니다.
"이놈아! 진지공사 하나 제대로 지휘 못하는 놈이 뭘 믿고 건방지게 굴어!"
그러나 김상구는 일개 영관이 장군에게 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대거리를 서슴치 않습니다.
"내가 당신보다 군사학을 더 공부하고 임관했소!"
장태완 장군은 고졸출신으로 몇주간의 군사학을 수료한 후
바로 6.25전쟁에 투입된 갑종 장교출신이었는데
그런 그를 대놓고 무시한 겁니다.
그만큼 육사 11기 이후로 만들어진 하나회는 안하무인이었습니다.
결국 분노한 장태완 장군은 김상구를 영창에 쳐넣어 버렸고
그로인해 김상구의 손윗 동서인 전두환과 하나회는 그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79년 12.12 당시
전두환은 장태완 장군에게 선배님께 식사대접 한 번 하면서
얘기하고 싶은게 있다며 그를 불러 냅니다.
당시 수도 경비 사령관으로 부임한 장태완은
전두환의 쿠테타 계획에 있어 가장 두려운 상대였고
쿠테타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그를 떨어뜨려 놓고자 함이
전두환의 계획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부하장교를 약속장소에 보내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의 급작스런 호출로 다소 늦을듯 하니
먼저 식사와 술을 드시고 계시면 곧 올거라는 말로
장태완 장군을 붙잡아 둡니다.
그리고 그사이 정승화 참모총장 납치 및 국방부 장관 습격을 벌입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장태완 장군은 급히 부대로 복귀하여
사태파악 및 전력을 수습하였는데
이미 휘하부대 450 여명의 장교들 중 400여명이
수 년 전부터 전두환에게 포섭되었고 단 50 여명의 장교들만이
자신을 따를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안타까운게 당시 장태완 장군이 수도 경비 사령부의
지휘관으로 취임한지 겨우 20 여일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는 것.
게다가 휘하부대 전투병력을 가진 부하 장세동이
알고보니 전두환의 오른팔이었고
다른 사단의 협조를 받아 자신의 예하부대로 투입코자 했던
11사단과 26사단은 국방장관의 지시가 있어야만 움직이는데
국방부 장관은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서 숨어버려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
만약 국방장관 노재현이 혼자 도망가 숨어버리는 대신
26사단, 9공수여단, 11사단을 출동시켜
장태완에게 딸려줬으면 역사의 판도가 바뀔 수도 있었다는 점.
장태완의 부대로 도망쳐 온 육군본부의 장군들은
장태완에게 대화로 해결하자며 그를 뜯어 말리고 방해만 일삼았다는 점.
이들이 장태완 장군을 도와주진 못할망정 얼마나 멍청했느냐면
전두환에게 포섭되지 않은 제 9공수 특전여단을 겨우겨우 출동시켰더니
다음과 같은 전두환의 거짓말
"나도 쿠테타 그만두고 병력을 퇴진시킬테니 그쪽도 퇴진시키시오.
남자답게 서로 약속지키는 걸로 신사협정 맺고 없었던 일로 합시다,
서로 피 흘릴 일 뭐가 있겠소"
이 말에 속아서 장태완 장군과는 상의도 없이
9공수 특전여단에게 철수명령을 내립니다.
그럼에도 장태완 장군은 행정,전산병, 취사병까지 끌어와 무기를 지급하고
겨우겨우 100 여명의 전투부대를 만들어
전두환에게 돌진해 싸오고자 했습니다.
당시 60공 트럭 한대, 장갑차 2대만을 겨우 끌어 모았고요.
그러나 그러던 와중 영내에 있던 그의 부하장교들이
승산없는 싸움이며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는 판단에
장태완 장군과 그의 부대로 피신 온 육군본부 장군들에게
총뿌리를 겨누며 전두환에게 가져다 바칩니다.
장태완 장군은 두 달 여간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고
그의 아버지는 충격에 식음을 전폐하고 한 달 뒤 사망.
그의 아들도 충격에 떠돌다 변사체로 발견.
그의 아내 역시도 옥상에서 투신자살...
이렇게 장태완 장군은 서빙고에서의 고문 후 이등병으로 강제 예편
가택연금 등. 모진 수난과 고초를 겪으며 한 많은 삶을 살다 갑니다.
그는 변사체로 발견된 아들의 묘지명을 직접 썼는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1학년의 모범 우등생. 고 장성호의 묘
여기 채 못다 핀 한송이 꽃이 최고의 선을 위해
최대의 인고로 향학하다 수석의 영예를 안고
1982년 4월의 짧은 인생을 마치고 고이 잠들다."